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여담 === * 2차 대전에 비해 인지도나 관심이 떨어진다. 한국도 마찬가지. 전쟁 초기 1년 동안만 [[마른 전투]], [[타넨베르크 전투]] 등 점령과 방어 등이 일어났지 나머지 3년간은 참호에서 밀고 당기고만 하는 [[소모전]]의 연속이었으며, 주 전장도 유럽으로 국한되었다는 평가가 대세다. 이는 1차 대전에 대해 주로 전쟁사적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뿐, 외교사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 배경과 전후 결과물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이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흥미의 차이일 뿐 딱히 비판받을 만한 요소는 아니다. * 한국에선 2차 대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지기에, 독일이 일으킨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독일이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 이런 식. 이 문서 제일 위에 있는 개요를 봐도 알 수 있지만, 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선전포고 한 게 시작이다. 다만 오스트리아는 전쟁 내내 별다른 힘을 못 쓴데다, 동맹국의 핵심은 독일이었으며 독일로 인해 세계대전의 규모가 커졌고,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데다, 나중에 터진 2차 대전은 독일이 일으켰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이 (선제적이라곤 하나) 프랑스에게 먼저 선전포고하고, 그 과정에서 중립국 벨기에를 건드려 영국까지 끌여들여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커진 건 사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한 1차 세계대전의 이미지인 서부전선의 총성을 울린 것은 독일이 맞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 한 이후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함으로써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로 끝난 걸 세계대전으로 제대로 판 키운 건 러시아다. * 2차 대전보다 수십 년 이른 시기에 일어난 전쟁이라서 연상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전쟁도 2차 대전처럼 당시 인물들의 육성이 남아 있다. '전쟁의 전개' 문단의 영상에도 나온다. *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2차 대전]]과는 달리, [[네덜란드]]는 전쟁 끝까지 [[중립국]]으로 남았다. 이는 1830년 [[벨기에]] 분리 이후에 네덜란드는 국제 [[분쟁]]에서 [[중립]]을 철칙으로 삼았기 때문. 이웃 나라 [[벨기에]]는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독일군]]의 침공을 받아 협상국의 대열에 섰지만, 독일군은 네덜란드는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네덜란드 내부에서는 친독파, 친불파들이 각각 상당한 세력을 보유했지만, 전통적인 국가 정책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중립정책은 1940년까지 지켜졌지만, 네덜란드도 2차대전 때는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고 연합국의 대열에 섰다. * [[2011년]] 현지 시각으로 [[5월 5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 중 전투를 경험한 최후의 생존자였던 [[영국인]] 클로드 스탠리 슐스(14살 때 [[해군]]으로 참전)가 [[호주]]에서 사망하였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56100006&ctcd=C08|기사]] 친지들의 증언에 의하면 슐스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했기에 평생 동안 전쟁을 혐오했다고 한다.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최후의 생존자 플로렌스 베아트리스 그린(영국 공군 여성 항공대)도 [[2012년]] [[2월 4일]]자로 사망했다. 이것으로 '누군가가 경험한 1차 세계 대전'은 21세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1918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까지 모두 사망한다면 1차 세계 대전기 사람은 모두 사라진다. * 2차 세계 대전과 시간 차이가 얼마 안나는 만큼 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이를 기반으로 후일 2차 세계 대전에서 각국의 중요인물이 되어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 우선 영국에선 [[윈스턴 처칠]]이 그러했다. 명성을 떨친 2차 대전 때와 다르게 1차 대전 때는 실책을 연발했다.[* 사실 처칠의 군사적인 식견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굵직한 실패의 순간, 혹은 실패할 뻔한 순간의 배후에는 항상 처칠이 있었다. 다만 2차 대전 때에는 최소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말리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준 경우가 많았음이 다행. 나름대로 1차 대전에서 얻은 교훈이 있긴 한 모양이다... 는 개뿔, 사실 2차대전 때도 실패를 많이 한 편이었다. 그래도 1차대전의 갈리폴리 전투만큼 큰 삽질은 없었고 주위에 말린 사람도 많았고 또, 정치 및 외교에서는 거대한 족적을 남겨서 그의 삽질이 가려진 것일 뿐이다.] 전쟁 전에 [[해군]][[장관]]이었던 그는 오스만이 영국과의 [[동맹]]을 제안했을 때 반대한 관료였고, 영국에서 건조되던 오스만의 전함을 압류해 오스만을 적으로 돌렸던 장본인이다. 처칠은 전쟁 중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입안했지만 이 작전의 거대한 실패로 정치적 인생이 끝나 의전직에나 있다가 퇴임해 전방의 육군 중령이 되어 활로를 모색해야 했었다. 그나마 [[금수저]]라 곧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막 개발되던 [[전차]]의 개발을 지지해 주는 등의 공적으로 그나마 만회했다. * 훗날 [[튀르키예]]의 [[국부]]가 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오스만의 대령으로 큰 전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하며 큰 명성을 얻고 대전 직후에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활약했다. 어떻게 보면 처칠이 튀르키예와 아타튀르크를 살린 셈. *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정확히는 바이에른 왕국군. 바이에른 왕국이 독일 제국 소속이긴 하나, 여타 다른 국가들의 자치국과는 달리 독자적인 군대도 보유할 수 있었다.] [[연락병]]이라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에게 이 훈장이 수여되어야 한다고 추천한 사람은 유대인 장교였다. 이 사람은 2차대전 때까지도 살아 있었는데, 은혜를 기억한 히틀러가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해 주었고 미국에서 편안히 여생을 마쳤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는 작은 인연이나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도 [[참호]]에서 [[파라티푸스]]에 시달리기도 했고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 전쟁에서 42사단의 참모로 활약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 의외로 [[https://www.youtube.com/watch?v=M-l3BWg5q4Y|영상 자료]]도 꽤 남은 편이지만 당대 기술의 한계로 무성필름이다. * 독일의 물리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전쟁이 발발하자 4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일 육군 [[포병]][[장교]]로 임관하여 전선으로 나가서도 물리학 연구를 멈추지 않고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블랙홀|일부 해석해]]를 내놓는 업적을 세웠지만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1915년에 천포창[*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이다.]이라는 [[피부병]]에 걸려서 [[1916년]]에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후일 장남이자 천체물리학자인 마르틴 슈바르츠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군으로 참전하였다.] * [[개기일식]]을 이용한 [[중력렌즈]] 효과 관측을 통해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려던 시도가 이 전쟁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다. 1914년 8월 21일에 [[러시아 제국]] 서부를 통과하는 개기일식이 예정되어 있었고[* 오늘날의 [[올란드 제도]]와 [[핀란드]] 남서부,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과하였고, [[리가]]와 [[빌뉴스]], [[민스크]], [[키이우]]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오스만 제국]] 동부(오늘날의 [[튀르키예]] 동부와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에 해당), [[이란]] 일대와 [[파키스탄]] 해안에 이르는 지역을 통과하였다.] 이 기회를 활용하여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세 개의 관측팀이 관측을 시도할 예정이었는데... 하필 한 팀이 독일 팀이었고 관측 준비 중에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해당 관측팀이 그대로 러시아에 억류되었고 나머지 두 팀은 기상 문제로 관측에 실패하였다.[* 키예프에서 관측한 미국 탐사대 중에는 대논쟁으로 유명한 [[히버 커티스]]도 있었다.] 결국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전쟁이 끝난 1919년에야 일식을 통한 검증에 성공할 수 있었다. * 2018년 11월 11일 프랑스에서 종년 100주년의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https://mn.kbs.co.kr/news/view.do?ncd=4071061|기사]] * 영국 군인 [[헨리 텐디]]와 '''[[아돌프 히틀러]]'''에 연관된 흥미로운 도시전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헨리 텐디 문서 참조. * [[타이타닉]]의 자매선 [[RMS 브리타닉]]과 또다른 자매선 [[RMS 올림픽]]과 경쟁하던 [[RMS 루시타니아]]는 이 전쟁에서 침몰했다.[* RMS 브리타닉은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의 영향으로 구명정도 많았고 느리게 침몰했던지라 30명을 제외한 모두가 살아남았지만, RMS 루시타니아는 너무 빠르게 침몰해서 무려 1198명의 사망자를 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